빌립보서 1:1-2
빌립보교회에 대한 인사
2004. 9. 5~ 주일저녁
차용철 목사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1:1-2)


바울은 옥중(獄中)에서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유럽의 관문 마게도냐로 건너가 처음으로 세운 교회입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로 시작된 그 교회는 바울의 선교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바울도 그 교회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하고,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준 것을 감사하고, 교인들간의 불화를 훈계하고, 유대주의자들의 교훈에 대한 경계를 권면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빌립보 전 장을 통해 바울의 빌립보교회에 대한 애틋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장은 그 편지의 서두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교회를 사랑하는 바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에 대한 인사(1-2절)와 빌립보교회에 대한 감사와 간구 (3-8절)와 빌립보교회를 위한 기도(9-11절)와 바울의 상황보고와 결의와(12-18절) 바울의 간절한 소망과(19-26) 빌립보교회를 향한 권면이(27-30)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 1~2절은 헬라의 정형화된 편지 서문 형식(prescript)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헬라의 정형화된 편지 서문 형식은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기쁨을 빈다는 형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정형화된 형식에 자기들의 신앙 정신을 추가한 형태로 사용했습니다 (단4:1, 겔7:12). 바울은 그러한 양식을 기독교적 신앙과 정신으로 확대하여 사용했습니다.


1. 발신자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보내는 자신에 대해 소개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형제 소스데네를 공동 발신인으로 함께 쓰고,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실라를 공동 발신인으로 하고, 빌립보서에서는 디모데를 공동 발신인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볼 때 디모데는 나이로 보면 자기 아들 같은 사람이고, 사역으로 보면 조사(助師)로서 오늘날 교회에서 부교역자 정도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바울이 동역자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겸손한 면모이기도 하지만 진실됨 보여 주는 면모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사역 문화와는 사뭇 다릅니다. 우리 나라의 많은 부교역자는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최근 기독교노조가 생겼습니다. 교회에서 노조가 생긴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이지만 노조가 생기기까지 부교역자들을 사각지대에 방치한 교회와 담임목사들의 책임도 통감해야 합니다. 하나님 일은 동역자간의 신뢰가 구축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야의 사역이든 서로 존중하고 합의하고 배려하고 희생하는 정신을 가져야 사역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바울은 자신을 예수의 종 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 (δουλοs)은 구약에서 자주 나오는 주의 종 이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볼 때 모세나 여호수아나 다윗이나 엘리야 같이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핵심적 리더 역할을 하는 자를 의미할 것입니다. 곧 주의 일을 하는 자로서의 권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4:1에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로 여기는 것을 보면 자신이 구원사에서 한 부분을 담당하고 실현하는 리더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종 (δουλοs)은 당시 헬라나 로마 문화에서는 비하의 단어입니다. 하인 의 개념이 아니라 노예 의 개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삶의 자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예속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김세윤 박사는 한국 교회들에서 목사를 주의 종님 이라고 부르는 말은 하나의 한국말에 대한 폭력이라고 했습니다. 종 과 님 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는 주의 종 의 개념은 주의 일을 맡은 자로서 권위만 나타내는 용어로 굳어져 있습니다. 목회자들 스스로 주의 종 이라고 하는 데에는 권위만 내세우고 낮아지지 않으려는 의식의 강한 것 같습니다. 사모 라는 용어도 하나의 직책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스스로 사모 라고 하거나 목회자가 자기 아내를 사모 라고 하는 것도 권위 의식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모 는 남이 스승처럼 존경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부인을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맡은 자로서 종 (δουλοs)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높임받으려는 데 사용하지 말고 낮아져 섬기려는 데 사용해야겠습니다. 종의 자세는 이렇습니다. 첫째, 자기 것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것을 자기 소유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둘째,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종은 자기 뜻대로 결정하거나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주인의 뜻대로 주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셋째, 자기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종은 자기를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직 주인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희생 과 복종 과 충성 입니다 (고전4: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산 노예입니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며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2. 수신자는 빌립보교회 성도와 감독과 집사입니다.

바울은 문안 인사에서 빌립보교회의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과 집사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고 했습니다 (1절).

성도 (聖徒,saints)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스 (αγιοιs)는 구약 히브리어 카다쉬 입니다. 제사 용어로 본다면 정결의식을 통해 죄로부터 분리된 자를 의미하고 이차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바침이 된 자입니다. 언약 용어로 본다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선택해 주시고 복을 약속해 주심에 힘입은 이스라엘 에 대한 칭호입니다. 출애굽기19:6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베드로전서2:9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했습니다. 구약에 나온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구절이 신약의 교회에 동일하게 적용된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새 언약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소유이고 제사장 나라이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같이 혈통적이 아니라 믿음으로 언약 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적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로 대체된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성도의 단체로서 거룩한 것은 하나님이 언약 안에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기 때문이고 이차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곧 성도라 일컬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이고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의미입니다.

감독 (監督, επισκοποιs, bishops)는 장로 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딤전5:1, 딛1:5-7, 벧전5:1-2) 교회 전체를 가르치는 일과 치리하는 일을 관장하는 교회 리더들을 말합니다. 초대교회 초기에는 감독 과 장로 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후기에는 감독과 장로를 구분지었습니다. 감독 은 교회 전체를 감독하면서 가르치는 일에 전담하는 자로서 교회에서 한 명만 두었습니다. 장로 는 교회 회중의 어른으로서 주로 치리와 행정을 담당하는 자였고 한 교회에 여러 명을 두기도 했습니다. 집사 (執事, διακονοιs, deacons)는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자들입니다. 당시 집사는 교회의 실제적인 일들을 담당했습니다. 심지어는 구제와 전도와 설교까지 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문안인사를 하면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도 함께 문안 한 것은 교회에서의 그들이 차지한 권위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온 헌금은 그들의 일치 단결된 마음이 가능케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교회의 고난을 가중시키는 불화가 그들로 인하여 고착화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의 교회에는 리더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3. 인사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입니다.

바울은 문안 인사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고 했습니다 (2절). 이 문안 인사에는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가지는 진정한 사랑이 나타납니다.

은혜 (恩惠, χαριs, grace)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행위와 상관 없이 받는 선물 곧 혜택을 말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언약 하신대로 대가없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선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친히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언약하셨는데, 하나님이 그 언약대로 죄로 죽게 된 백성을 죄와 그 결과로 오는 사망과 그 주변의 모든 고통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선택(選擇)과 사죄(赦罪)와 중생(重生)과 칭의(稱義)와 성화(聖化)와 영화(榮華)가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그 은혜의 절정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救援)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은혜 라는 말은 상당히 곡해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다 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변형된 표현입니다.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엄밀히 말해 설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알게 하는 수단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차적 의미로 조금 확대 적용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확인시키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은혜 받았다 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은혜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적어도 설교의 메세지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담고 있을 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과 사역을 깨달았을 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가지신 계획과 목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주권적 구원과 성령을 통해 성취하시는 섭리를 깨닫고 확인하고 감격할 때 사용해야 합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이나 주관적 계시의 메세지를 담고 있는 설교나 개인적인 사상과 주장의 담고 있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설교에서는 조금 자제해야 합니다.

평강 (平康, ειρηνη, peace)은 평강, 평안, 평화 화평 등으로 표현합니다. 이 평강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곧 평강 이라 함은 은혜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평안 곧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용어로는 에이레네 이고, 구약의 용어로는 샬롬 (salom)에 해당합니다. 은혜 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냥 주신 구원의 선물이라 할 때, 평강 은 그 은혜로 누리는 행복입니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이 실제로 주신 구원의 은혜로 얻은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아들로 삼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죄를 없이해 주고 성령으로 성화를 이루게 하고 마침내 천국에 가게 해 주신 것을 누리는 행복입니다. 죄와 죽음과 내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공포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셔서 행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차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때 얻어지는 행복감입니다. 우리는 죄와 그 결과인 죽음과 그 증후군들인 여러 가지 다양한 고통들로 평안을 누릴 날이 없습니다. 오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고 안다고 해도 해결할 능력이 없고 내일의 결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근심하며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과 사역을 알면 평안을 얻게 됩니다. 성경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시고 어떻게 섭리해 오셨고 어떻게 목적을 이루실 것인지 깨달을 때 안정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평강입니다. 그 평강은 우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자기 마음이 편안해지고, 다른 사람과 화목을 나타내고, 자연만물과 건전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빌립보서의 발신자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가이사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수신자는 빌립보교회 성도입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빌립보 라는 세속적 영역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갇혀 있는 바울이 세상의 범주에서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인사하는 것은 진정한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인사에는 바울의 진실한 사역관이 묻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는 인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야 합니다.